AD 70년에 이스라엘이 멸망하자 교회는 이스라엘 자리를 대신하였는데, 이것은 ‘대체신학’의 기본틀이 되었다. 가장 큰 배경은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이었지만, 로마의 핍박이 미칠 것을 우려한 교회가 유대교와 차별화하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그 후 유럽 교회들은 유대인들을 학대하거나 악마로 내몰기도 하였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는 성경을 인용하여 피값을 전가시킨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대해 유대인 요셉 슐람 목사는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이 유대인에게 합류해야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엡 2:11-22).

 

시오니즘은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 국가를 재건하려는 유대인들의 민족주의 운동이다(마 23:39, 로 11:26). 이스라엘이 로마에 함락된 후 지중해 연안 국가로 흩어져 2천년 동안 떠돌아다니던 유대인들은 유월절마다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라는 말을 되풀이 하면서 귀향의 꿈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1897년, 유대계 저널리스트 테오도르 헤르츨 Theodor Herzl은 스위스 바젤에서 제1차 시오니스트 회의를 소집하였고, 1901년까지 시오니즘 회의를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1905년 러시아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러시아 거주 유대인들은 박해를 피해 팔레스타인으로 불법 이주를 감행하였다.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인구가 50만명이었고, 그중 유대인은 2만명에 불과하였다. 영국은 1917년에 오스만 터키로부터 팔레스타인을 흡수하고, 벨푸어선언을 하였다.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하도록 지지한 것이다.


1918년 1차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경제적 공황에다 전쟁보상금까지 갚아야 했다. 1933년 수상에 취임한 히틀러는 기존의 나치당 공약인 ‘반유대주의’에 따라 1,300개의 유대 회당과 7,000여개의 상점을 약탈하고 2만명을 감금하였다. 그리고 30만명에게서 몸값을 받아 경제 기반을 다졌다. 1939년 2차대전을 일으킨 히틀러는 마침내 600만명을 학살하였다. 이러한 시련은 결과적으로 유대국가 창설을 독려하였고, 마침내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독립을 이루게 된다.

히틀러 당시의 폴란드 랍비 바이스만델 Weissmandl은 어린이들만이라도 구원해 달라고 로마 교황청에 편지를 썼으나 모든 유대인 피는 악하다는 답장을 받았다. 2014년에 PBC 평화방송이 방영한 ‘하나님의 강한 종’이라는 영화도 유대인 학살을 묵살할 수 밖에 없었던 교황의 심적 갈등을 표현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런 학대를 받을수록 이사야 62장 1절의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이라는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였다.


영화 ‘영광의 탈출 Exodus'은 1947년에 있었던 이스라엘 건국 일화를 다룬 작품이다. 2차 대전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유럽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하다가 영국군에게 붙잡혀 키프로스 감옥에 수용되었으나, 마침내 이스라엘 하이파 항구로 돌아오는 감동의 스토리이다.

세계기독교박물관은 당시 키프로스 감옥에 수감중이던 611명 중의 한 사람인 아브라함 벤 바루크가 ‘귀향의 꿈’을 비행기 파편에 새긴 알미늄 보석상자를 소장하고 있다. 2003년 이스라엘이 이라크와 전쟁을 할 때 그의 아들이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골목에 들고 나온 유물을 사 들인 것이다.


시온산은 원래 다윗성으로(삼하 5:7), 예루살렘 분문 糞門 밖에 있었다. 그러나 이 명칭은 점차 성전을 지은 모리아산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으며(시 76:2) 나중에는 예루살렘 또는 이스라엘 전체를 부르는 말로 광역화되었다. 성경시대 이후 원래의 다윗성이 발굴된 것은 1867년의 일이다. 그 이전까지는 시온산의 위치를 몰랐으므로 시온성문 밖의 높은 언덕을 시온산으로 지목하였다. 다윗 가묘가 그곳에 있는 이유도 그러한 배경 때문이다.<출처:세계기독교박물관 www.segibak.or.kr 기독교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