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박이야기

2-3. 이스라엘로 가는 길목, 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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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tra에 입사한 지 4년만에 나는 중동에 있는 오만 무스카트로 첫 해외발령을 받았다. 사실은 발령을 받고 나서야 오만이라는 나라를 알게 되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인구 60만명의 작은 나라인데다 한국이 오만 원유를 수입하기 전이어서 교역량도 적었기 때문이다.

당시 kotra는 국내 2, 해외 3년을 번갈아 근무하는 기관이었지만 신입사원은 4년 동안 본사에서 근무를 해야 했다. 신혼 때 우리는 첫 아이를 데리고 망원동 연립주택에서 살았는데, 해외발령은 어쨌든 기쁜 소식이었다. 간신히 장만한 집에서 방 3개 중 2개를 세 주었고, 융자도 갚아 나가야 했으므로 탈출구가 마련된 셈이었다.

 

12월에 오만에 도착해 보니 그곳은 이슬람권이어서 교회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고, 십이조는 별도로 잘 모아 두었다. 십일조가 아니고 십이조가 된 것은 해외발령을 받기 전에 첫 번째 근무지에서는 십이조를 드리기로 서원기도를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오만에서 1년이 무사히 지나갔고, 성탄절이 다가올 즈음 우리 부부는 복음 전파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철저한 이슬람 국가이므로 복음을 전하다가 추방되면 곤란하므로 고민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양말 가게에서 한국 것을 발견하였고, 그곳에서 양말 500컬레 정도를 사서 길거리에서 나눠 줘 보았다. 워낙 더운 나라여서 양말이 필요없을 것 같지만 공짜여서 그런지 잘 받아 갔다. 그리고 양말을 줄 때마다 우리는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하는 걸 잊지 않았다.

1982년 당시 우리나라는 수출 확대가 절체절명의 과제였고, 외화도 절약해야 했으므로 본사에서는 해외 근무 직원들에게 국산품 구입 실적을 보고하도록 했다. 오만에 수출된 한국 상품은 시멘트와 자동차, 텔레비전 그 정도였으므로 분기말마다 이 문제로 고민이 컸는데, 한국 양말을 사게 되어 잘 된 셈이었다.

다음해 성탄절이 다가 오자 우리는 십이조를 꺼내어 한국산 양말을 어마어마하게 샀다. 그리고 주말마다 그것을 차에 가득 싣고는 오만의 60만명, 10만 가정에 성탄의 기쁨을 알리려고 골목골목 다니면서 메리 크리스마스소리와 함께 양말을 한 컬레씩 나누어 주었다. 나는 운전을 하고 아내가 창문밖으로 나누어 주었는데, 성탄 선물을 나누어 주는 것은 종교 경찰이 보더라도 덜 위험하고 간접적으로나마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으므로 재미가 있었다. 우리가 이 일을 2년 동안 하자 어떤 사람은 작년에 받았다고 말했고, 어떤 사람은 어제 받았으니 다른 사람에게 주라며 사양하기도 했다.

오만은 세계 최고의 유향 생산국이다. 남부 살라라 지방에는 유향박물관이 있는데, 세계기독교박물관에도 오만 유향을 잘 전시해 두었다. 살라라 해변에는 시바 여왕의 목욕탕이라는 곳도 있고, 성경에 나오는 금의 산지 오빌이 오만 남부라는 학자도 있다.

오아시스로 가면 대추야자 나무에 물항아리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항아리에서 물이 스며 나와 증발할 때 열을 빼앗아 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로 항아리 속의 물은 서늘하여 마실 만하다. 전기와 냉장고가 없는 외딴 오아시스에서 그게 어디인가.

나는 이 항아리 하나를 기념으로 사 와서 서울 집 발코니에 늘 걸어 두었는데, 나중에 그만 끈이 떨어져 박살나고 말았다. 박물관에서 광야 문화를 소개하려면 꼭 필요한 자료인데 너무 아쉽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오만에서 태어난 둘째 딸이 고2가 되었을 때 고향여행을 보내 주면서 항아리를 사 오라고 부탁했고, 그 항아리는 지금도 제4전시관에 소중하게 걸려 있다.

오만은 지독하게 덥고 메마른 곳이어서 kotra에서는 특수지 중에서도 지역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달나라같은 그 분위기를 즐기면서 잘 살았다. 오아시스를 찾아 가 적당한 집 옆에 차를 세우면 우리 아이들은 금방 동네 아이들과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도시락을 꺼낼 즈음이면 어른들이 밖으로 나와 우리 가족을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처음에는 우리가 마당에 앉아 있게 되지만, 조금 후에는 주인이 내 아내를 내실로 데려 가고, 마지막에는 나도 들어가 사막의 흙집 구조와 주거문화를 잘 공부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중동 사람들의 문화와 관습을 익혀 나갔다.

 

오만에서는 3년 근무하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2년이 되어 갈 무렵 갑자기 카이로로 전근 발령이 났다. 당시 인사계장 말에 의하면 무스카트무역관은 해외 조직망 120여개 중 업무 실적이 연속 1~2등이어서 나를 런던으로 보내는 안을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카이로로 결정되는 것을 보고 성적 우수자를 좋은 곳으로 보내지 않으면 인사계장 해 먹기 어렵다고 항의했지만 반영이 안 되었다고 한다.

kotra는 직원수가 천 명이 넘는 데다 해외 근무가 많아 서로 얼굴을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정년퇴직 후 OB 신우회 모임에서 인사계장이 그 옛날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그 때 미안했노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세계기독교박물관을 향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이 작은 인사발령 문제에까지 작용하신 것을 깨닫고 무척이나 놀랐다. 그리고 그 선배에게 진심으로 감사인사를 전하면서 런던보다 카이로가 더 좋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해 주었다.

왜 카이로가 더 좋았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이야기 해 주지 못했지만, 사실 나는 이집트에 사는 동안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다. 우선 기독교박물관에 전시할 애굽 물건과 자료들을 수집할 수 있었고, 이스라엘 못지 않게 많은 성지들을 탐사할 수 있었다. 한국 출장자들의 길 안내를 해야 했으므로 이집트 역사공부를 해야 했고, 카이로국립박물관 유물들의 위치와 설명문을 외워야 했다. 이런 경험과 지식들은 나중에 성경에 나오는 물건과 관습그리고 성경 식물책을 발간하는데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이집트에서는 처음부터 박물관 물건을 수집한 것은 아니다. 그때는 서울에 장래집을 사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하였으므로 돈을 아끼는데만 집중했다. 그러다가 사무실 동료가 이스라엘로 여름 휴가를 간다는 말을 듣고 따라 나섰는데,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지 않고 버스를 이용하였다. 그리고 그 결정이 옳았다.

카이로에서 이스라엘 가자지구로 가는 해안도로는 출애굽 경로는 아니지만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 가던 길이었고, 예레미야와 성가족이 피난가던 길이기도 했다. 그리고 알렉산더가 애굽으로 진격하던 길이었고, 바로 느고가 므깃도로 올라 오던 길이기도 했다. 가자지구 라파 국경검문소에 도착하여 나는 이스라엘 여군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이집트 군인보다 덩치가 훨씬 큰 데다, 군복과 외모도 깔끔했다. 엉덩이가 큰 그 여군은 소총을 거꾸로 둘러맨 채 쓰레기통을 일일이 점검하면서 혹시 폭탄이 들어 있는지 살펴 보았다. 내가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 유대인 두 가족이 축가를 불러 주었고,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우리 부부 머리 위로 보자기를 돌리면서 축하해 주었는데, 이 유대인 여군도 든든한 믿음을 주었다.

무엇보다 1주일 동안의 이스라엘 여행은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 당시 우리를 안내하던 가이드는 예루살렘에서 선교하던 김목사님이었는데, 예루살렘에서 브엘세바로 내려 가던 중 겨자씨를 보여 주었다. 바로 그 때, 내 심장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쿵쾅거렸고, 나는 그 일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렇구나, 이스라엘에는 성경에 나오는 물건이 지금도 있구나! 그렇다면 내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물매와 드라빔도 있겠구나.”

이스라엘에서 이집트로 돌아오자 나는 당장 성경에 나오는 물건 모으는 일에 집중했다. 그러나 그 일은 아직 체계적이지 못 하였고, 효율적이지도 못 하였다. 체류 기간도 얼마 남지 않아 마음만 초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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