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박이야기

2-2. 결혼 조건 다섯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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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시골에 비해 모든 것이 팍팍했다. kotra의 연수 기간 월급은 하숙비를 내고 나면 점심값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짜장면 값이 없어서 남대문시장까지 걸어가 라면을 사 먹은 적도 있다. 서울 생활에 익숙하지 못한 나는 '서울 가서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던 고향 선배의 조언을 실감했다. 다행인 것은 눈만 잘 뜨고 다니면, 시시콜콜 간섭하는 사람이 없어서 좋았다.

그 해 서울 생활은 그런 식으로 긴장과 갈등 속에 보냈다. 그러면서도 지리를 익히기 위해 종점에서 종점까지 시내버스를 타고 다니는 서울순례, 이 교회 저 교회를 탐방하는 교회순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가을 낙엽이 떨어질 즈음, 나는 옆구리가 시린 것을 느꼈다. 교회순례만 하다 보니 신앙생활도 깊이를 잃어 버렸다. 외로왔다. 출석 교회를 정해야 할 시간이 된 셈이다

그 즈음 주변에 굴러다니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주보를 우연히 보았는데, 호감이 갔다. 처음 간 그 교회는 규모도 컸지만 은혜로왔다. 그래서 그날 바로 등록서를 써 내었다다음날 저녁, 담당 구역장이 내가 적어 낸 등록서를 손에 들고 심방을 왔다. 그때는 전화도 없이 남의 집 부엌방에 월세로 살았는데, 주소를 들고 찾아 온 것이다.  대형교회에서 이렇게 신속하게 행정이 처리되는 것을 보고 내심 놀랐다. 게다가 구역장은 미혼 여성이었다나는 철산리 고개 위의 좁고 누추한 월셋방을 남에게 보여주기도 싫었지만, 젊은 여성과 작은 방안에 마주 앉는 것도 불편한 일이므로 인근 다방으로 갔다. 상담 내용은 갈급한 내 영혼 문제, 그리고 중고등부 교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이었다.

나는 구역장이 안내해 준 대로 일주일 철야기도를 작정하고 철산리에서 여의도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밤샘 기도를 하였다. 새벽에는 철산리로 돌아 와 아침밥을 먹고 다시 통근버스로 명동까지 출근하였다. 월요일에 구역장을 만났고, 목요일에 철야를 시작하였으므로 마지막 밤은 수요일이었다. 마침 그 날에는 목사님들이 여러 분 오시더니 철야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안수기도를 해 주었다. 나는 그 때부터 방언기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중고등부 교사는 교사대학에 등록해서 2개월 동안 매주 2시간씩 교육을 받고, 그 후에 심사를 받아야 된다고 했다. 이런 교육이 연간 몇 차례 있는 것 같았는데, 내가 참석한 시기에는 수강생이 300명이나 되었다. 웬만한 교회 교인 숫자만큼 중고등부 교사 교육을 받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교육이 중반에 접어 들었을 때 성서개론 시간이 되었다. 강사는 단발머리를 한 여전도사였는데, 그가 강단에 올라올 때 나는 단번에 외쳤다. , 나와 결혼할 사람!

그날 나는 강의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강사님은 강의를 끝내면서

성서개론은 두 시간에 끝내기 어려운 과목이므로 질문이 있는 사람은 전화로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얼른 전화 번호를 받아 적었고, 강사가 교회학교 사무실에 도착할 즈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사무실에서 할 수 없는 중요하고 급한 상담을 하고자 하니 교회 앞 커피숖으로 꼭 좀 나와 주시라고 요청을 하였다. 한참 후 강사님은 교회학교 교장 목사님의 어린 딸을 데리고 나왔다. 강의 때와는 달리 매우 냉랭하였으나, 다행히 질문은 경청해 주었다.

나는 강의 내용과 관련이 깊은 것부터 상담해야 상대방이 도망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질문을 시작했다. 첫 질문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왜 속이 늘 허전한지?’였고, 거기에 대한 대답도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은 강의 시간에 추천한 참고서를 좀 사야 하겠는데, 어디서 살 수 있는지였다. 종로 어디에 가서 사면 된다고 가르쳐 주었으나, 나는 거기를 모르니 꼭 좀 같이 가 주시기를 요청하였다. 물론 거절당했으나, 교회학교 사무실로 다시 전화하여 몇 주 후에 비로소 기회가 만들어졌다.

나는 미리 이발을 하고, 책 구입비도 준비해서 약속 장소로 나갔다. 그런데 강사님은 남자 동료를 세 명씩이나 데리고 나왔다. 간신히 음료수 값을 지불하였고, 책도 한 권 사 왔다.

내가 결혼을 염두에 두고 만난다는 것을 상대방이 알아 차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몇 달후, 강사님은 자기와 결혼하려면 다섯 가지 조건이 모두 맞아야 하므로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고 했다. 기껏 서너 번 만난 사이에 결혼 조건을 내세우는 것이 야속했지만, 나는 그 조건들이 뭐냐고 물었다.

첫째는 장남이라야 한다고 했다. 손위 동서가 있으면 형님이라고 불러야 하는데, 그런 게 싫다고 했다. 이 문제는 저절로 통과되었다. 나는 2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둘째는 장로 아들이라야 한다고 했다. 이 문제도 통과되었다.

셋째는 좀 우습지만, 사과 과수원집 아들이라야 한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사과를 너무 좋아해서 어머니가 늘 사과 과수원집 아들이 아니고서는 그 많은 사과를 누가 감당하겠느냐. 사과집 아들하고 결혼하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감사하게도 이 문제도 잘 통과되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사과밭집 아들이었고, 고향에 가면 늘 사과밭에서 아버지 일을 도와 드려야 하는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넷째 조건은 아주 어려운 조건이었다. 자기를 데리고 이스라엘에 가서 함께 몇 년은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kotra에 근무하고 있었으므로 거침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것은 나도 바라는 바였지만, 사실은 당시에는 이스라엘에 kotra 무역관이 없었으므로 숙제 중의 하나였다.

그 외에도 한 가지가 더 있었는데, 나는 그걸 늘 잊어 먹는다. 지금 아내에게 그게 뭐였느냐고 물으면 알려 주겠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쓴다. 

이렇게 나는 정정숙 전도사를 만났고, 1년이 지나 다시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1980104,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장은 바로 내가 1주일 동안 철야기도를 하던 여의도 교회의 베들레헴홀이었고, 4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세계기독교박물관 관리실에서 함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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