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박이야기

2-1. 준비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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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진로를 선택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가 되었다. 많은 생각을 했지만 나는 장남으로서 사과 과수원과 농사일을 물려 받아야 한다는 마음이 가장 앞섰다. 그때는 아직 주의 종이 되겠다는 서원기도를 하기 전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농업고등학교에 진학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닭이라도 수 백 마리 기르려면 제대로 배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 즈음, 경북여고에 다니던 교회 누나가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에 왔다가 함께 수요일 저녁 예배에 가게 되었다. 우리 집은 교회에서 2km나 떨어진 서원리 웃갓단에 있었으므로 동네 교인들은 자연스럽게 우리집으로 모여 함께 고개를 넘어 교회로 갔는데, 늑대가 사람을 헤치기도 하던 당시에는 그게 안전하였다.

동네 교인 10여명은 우리 집을 함께 나섰는데, 어른들은 앞에서 들판길을 걸어 갔고, 누나와 나는 대여섯 걸음 뒤서서 따라갔다. 그때 누나가 갑자기 물었다.

, 고등학교 어디에 갈거니?”

나는 이미 농고에 진학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지체없이 대답했다.

대구농고 갈거야.”

안 돼, 인문계로 가.”

누나는 자기가 답을 정해 놓은 듯 바로 말했다. 그러면서도 왜 그래야 하는지 말해 주지 않았고, 나도 묻지 않았다. 나이로는 나보다 한 살 많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교회 누나였으므로 나는 곧 마음을 바꾸어 먹었다. 그리고 고향에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그 후 대학에 진학하여 대구시청 뒷편 헌책방 골목에서 최현배 선생의 우리말본책을 찾다가 우연히 그 누나를 만났다. 그러나 그 때에도 왜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라고 말했는지 물어 보지는 못 했다.

나이를 먹어 갈수록 나는 내 인생이 어떤 지정된 궤도 위를 달리는 기차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럴수록 그 첫 단추격인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누나가 대구에 산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게 없었으므로 미제로 남을 운명이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지 거의 40년이 지났을 때, 드디어 기회가 왔다. 청도 이서교회 설립 55주년을 맞아 home-coming day 행사를 하는데 누나가 온 것이다. 사실은 이 행사를 주관한 것이 남전도회였고, 나는 총무였으므로 행사 기획과 준비를 도맡아 하면서 누나가 온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난 후 단체사진을 찍으러 교회 마당으로 나갈 때 물어 보았다.

그때 왜 인문계 고등학교 가라 그랬어?”

누나는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기억도 안 나는 듯 웃기만 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해답을 얻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고등학교 2학년 때는 계명대학교에 진학할 생각을 굳혔다. 그 결정은 순전히 교회 부흥회를 인도하시던 강사 목사님의 설교 때문이었다. 강사님은 설교 중에 어떤 목사님의 설교 내용을 인용하면서 이 설교는 계명대학교 대강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아하, 대구에 가면 계명대학교라는 곳이 있고, 그 대학에서는 채플 예배도 드리는구나. 나는 그 대학에 가야지.’

고등학교 1학년 때 병을 고쳐 주시면 주의 종이 되겠습니다라고 서원 기도를 했지만, 솔직히 신학대학은 가기 싫고, 그런 미션 스쿨이 있다면 좋은 대안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예비고사를 통과한 나는 실제로 계명대학교 입학원서 접수 창구에 줄을 섰다. 문제는 아직도 영문과에 지원할 것인지, 국문과로 갈 것인지 확정짓지 못한 상태였다. 초등학교 때 학교 대표로 글짓기 대회에도 나갔고, 고등학교 때는 한국문학전집과 세계문학전집을 거의 모두 읽었던 만큼 국문과로 가고 싶었지만, 비행기 타고 세계를 다니려면 영문과로 가는 것도 맞기 때문이었다.

이서고등학교는 남녀 공학이었는데, 나와 함께 간 여학생 하나도 나와 똑같이 영문과냐, 국문과냐를 정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우리는 줄 속에서 같은 고민을 하면서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먼저 말했다.

네가 영문과 가면 나는 국문과, 네가 국문과 가면 나는 영문과 갈께

나는 그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지금도 모른다. 그냥 그런 말이 입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여학생이 영문과로 기울어지자 나는 지원학과 칸에 국어국문학과라고 써 넣었다.

당시 내가 공부하던 시골 고등학교에서는 무슨 과를 지망할 것인지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우선 대학 예비고사에 붙느냐, 못 붙느냐 그게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종합대학이니 단과대학이니 그런 말은 들어 보지도 못했다. 3 담임 선생님이 우연히 이런 사실을 알고는 가슴을 치면서 한 시간 내내 서울대학교 경우를 예로 들면서 종합대학이 무엇인지, 거기에 어떤 과들이 있는지 설명해 주셨다. 나도 그저 모의고사 1-2등 하는 공부 잘 하는 반장일 뿐 마찬가지였다.

 

대학 2학년을 마친 뒤 나는 군에 입대하여 병기대대 전임 군종사병으로 복무를 하였다. 주일에는 군인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평일에는 내무반을 순회하면서 저녁예배와 취침전 명상시간을 인도하였다. 그리고 낮에는 군부대 밖에 있는 민간인 재건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보초들에게 커피를 대접하거나 애로 상담을 하여 대대장에게 보고하는 일을 하였다. 

성탄절이 가까와지면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 교목실에 부탁하여 위문편지들을 받아 와 나누어 주었다. 병사들은 위문편지를 받으려고 자기 보초시간을 알려 주면서 그 시간대에 순시를 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군종 복무를 알차게 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6촌 형님이 너는 나중에 군대 가면 군종 하면 되겠다고 해서 오랫 동안 기대해 오던 그림이 현실화되었고, 그만큼 더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군종사병으로 선택될 때도 그랬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내 모습을 본 대대 사병계가 사령부 군종교육 대상자 명단에 내 이름을 먼저 올려 놓고는 식당에서 종식아, 군종 교육 잘 받고 와라고 해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의정부 군수지원 사령부에 가서 교육을 받은 지 한 달 후, 병과가 711 교환병에서 780 군종병으로 바뀌었다. 병기대대 안에는 미군이 사용하던 교회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으므로 우리는 그 다음 주일부터 바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그리고 1년 후에는 사령부 군목을 모시고 40명에게 합동세례도 베풀었다. 이 때 세례를 받고 나보다 먼저 제대한 병사들은 고향으로 돌아 갔고, 찬양대원 등으로 충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군종 사병으로서 나는 장례 집례도 하였다. 외박을 하고 돌아오던 동료가 열차에서 사고로 죽었을 때, 나는 의무병과 엠블란스를 타고 가 부서진 몸을 주워 담았고, 장례식 때는 부대 매뉴얼에 따라 군목을 대신하여 기도를 맡았다.


군 복무를 마친 후 대학 3학년에 복학한 나는 공부에만 몰두했다. 대구에서 4년 동안 대학을 다녔지만 시내 지리를 거의 모르는 것은 강의실과 도서관, 교회와 자취방만 쳇바퀴 돌듯 다녔기 때문이다. 복학한 후에는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머리도 항상 스포츠형으로 잘랐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끝나면 동네 목욕탕에 가서 피로를 풀곤 했는데, 한 번은 탈진하여 잠깐 쉬고 있을 때 목욕탕 종업원이 아저씨, 오늘 훈련 빡세게 받으셨나봐요라고 말을 걸었다. 머리를 짧게 잘랐으므로 군인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이런 저런 덕분에 학교성적은 4.0만점에 3.78로 다른 학생들보다 월등했고, 졸업식에서는 수석 상을 받을 수 있었다.

 

대학 3학년 말경, 언어학 교수님이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김종식 군, 강의 끝나면 학생처장실로 좀 오게.”

1976년 당시에는 학생들이 데모를 많이 했으므로 정부에서는 공부 잘 하는 학생 중에서 총학생회장을 임명하도록 했는데, 나를 본 교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학생과에서 올라 온 명단을 보니 자네가 이미 군대에도 갔다 왔고, 성적도 좋으니 다른 과 학생에게 맡길 거 뭐 있겠나. 자네가 내년도 학생 대표를 맡아 주게

총학생회장에 내정된 나는 첫 일정으로 대만 산업시찰을 다녀 오게 되었다. 그리고 1년 동안 학생회장 일을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어느덧 취업 시기가 다가왔고, 나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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