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박이야기

1-3. 가정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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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 전쟁 중에 태어난 전쟁둥이다. 1952년 그 해는 모교회인 이서교회가 세워진 해이기도 하다. 부모님은 원래 5km나 떨어진 구읍교회에 다녔으나, 광고시간에 이서에도 교회가 세워졌으니 집이 가까운 성도들은 그리로 가시라는 말을 듣고 곧바로 교회를 옮기셨다고 한다. 어머님은 만삭일 때 교회를 옮기셨고, 한 달 후에 나를 낳았으므로 청도이서교회는 나와 동갑인 72살이다. 

교회를 옮기기 전에 집도 이사를 하였는데, 그것은 집이 불 타 버렸기 때문이다. 구읍교회 부흥회에 참석하고 밤 늦게 돌아오신 부모님은 이미 불에 타버린 집을 바라보면서 이사를 결심하셨다고 한다. 그리하여 나는 어머님 뱃속에서 집과 교회를 모두 이사하는 신세가 되었고, 그 때문인지 전 세계를 돌아다녀도 지구가 답답할 정도로 방랑벽을 가지게 되었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난 나는 자연히 성경 이야기를 많이 들으면서 자랐다.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부모님께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르면 어머님은 주로 요셉이나 한이이야기를 해 주셨다. 나도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 어머님 정신이 좀 희미해졌다고 느껴졌을 때 호랑이에게 물려 가던 한이가 구원받는 이야기를 해 드렸다. 어머님은 내게 수없이 반복해서 들려주셨던 그 옛날 이야기를 기억해 내시고는 매우 흐뭇해 하셨다.

한이 이야기는 짧아서 하룻밤에 이야기가 끝이 나지만, 요셉 이야기는 좀 달랐다. 따라서 요셉 이야기는 항상 그래가지고 ……로 시작되었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는 장면과 감옥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어린 나에게 충격이었다. 이스라엘에 살 때 위험을 무릅쓰고 팔레스타인 자치구역에 있는 도단을 방문하거나, 애굽에 근무할 때 요셉 감옥 추정지 멤피스를 자주 간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외국에 살다 보면 주말에는 장시간 운전하는 일이 많다. 아이들이 차 안에서 지루해질 즈음이면 운전하는 나도 졸리기 시작한다. 그 때마다 나는 일단 그래가지고 ……를 외쳤고, 아이들은 요셉 이야기를 기다리면서 귀를 쫑긋 세우곤 했다.

아버지 장로님은 삼손 이야기를 종종 해 주셨는데, 밧줄에 묶인 삼손이 힘으로 그걸 끊어내는 장면을 연출하는 모습은 명품이었다. 바느질하던 어머님도, 옆에서 공부하던 누나들도 이 때는 아버지를 주목하곤 하였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눈을 빼고 감옥에 가두었을 때는 철사줄로 묶었다고 말씀해 주셨다. 자란 후 성경을 읽다 보니 그것은 철사줄이 아니라 놋줄이었다. 어린 내가 알아 들을 수 있는 단어로 바꾸어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고는 늘 아버지를 존경하게 되었다.

사실 놋줄(네호셰트)로 사람을 묶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아는 대로 놋숟가락은 매우 단단하여 잘 휘어지지 않는다. 놋에는 황동이 많이 들어가므로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좀처럼 굽어지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뻐덩뻐덩한 놋줄로 삼손을 묶었다기 보다는 놋 사슬 또는 놋 족쇄로 결박했을 것이다.

삼손이나 요셉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재미있는 밤은 주로 겨울이었다. 다른 계절은 밤이 짧아 그렇지 못하였다. 사과 과수원을 하시는 아버지는 새벽기도를 하고 오면 곧장 일터로 나가셨고, 온 가족이 모일 수 있는 시간은 저녁이었으므로 가정 예배는 언제나 저녁에 드렸다. 말이 저녁이지 보통 밤 9시 즈음이 되어야 했다. 누님들이 해 주는 저녁밥을 미리 먹고 숙제까지 끝내어도 부모님이 일터에서 돌아오시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어린 나에게는 가정예배 시간이 언제나 졸리고 피곤한 고통의 시간이었다.

하루는 너무나 졸려 기도시간에 나는 일부러 코 고는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난 후 너무 힘들다고 아버님께 하소연을 했다. 남동생도 아버지, 언제까지 예수 믿어야 합니까?’라고 물을 정도였다. 그 다음부터 예배시간은 좀 짧아졌고, 시작 시간도 당겨졌으나, 일시적일 뿐이었다.

 

이런 경험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자랄 때는 가정예배를 아침 식탁에서 드렸다. 예배 시간도 15분을 넘기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대신 가정예배에 결석하는 아이에게는 항상 아내가 밥을 주지 않았다. 덕분에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라는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면 다섯 아이들은 이방 저방에서 눈을 비비면서 모여들었다. 예배를 드린 후에는 언제나 온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가정예배 규율은 우리 부모님 못지 않게 엄격하였으므로 몇 가지 해프닝도 있었다. 당시는 박물관을 준비하기 위해 송파동 거실에 임시 사무실을 차리고 있었는데, 사무실 직원들이 아침 9시에 예배를 시작하자 개교기념일을 맞아 늦잠을 자던 늦둥이가 눈을 비비면서 예배 드리러 또 나오는 것이었다. 아내가 넌 아니야라고 말하자 아이는 도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도시 생활에서 온 가족이 저녁시간에 매일 모여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따라서 아침에 예배를 드리기는 했지만, 나로서는 저녁 가정예배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저녁에 가정예배를 드리지만, 아이들을 키울 때는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면 이마에 손을 엊고 아버지로서 축복기도를 자주 해 주었다. 아이들은 결혼한 후에도 자는 척 하면서 받던 그 축복기도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라고 말하곤 한다.

가정예배는 우리 가족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신앙 매뉴얼이 되었다. 위로는 부모님이 가정예배를 통해 우리를 양육하셨고, 덕분에 오남매의 부부들은 목사 2, 전도사 1, 장로 1, 권사 3, 집사 3명이 되었다. 그 밑에서 태어난 자녀와 손주까지 합하면 모두 56명인데,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교회에 잘 출석하고 있다. 그 중에서 장남인 나는 정정숙 전도사와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었고, 손주는 10명이다. 다섯째는 올해 말에 결혼할 예정이므로 손주는 더 늘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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