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 11일(화), 울산에서 근무하고 있는 제가 서울 송도병원에 가서 정기 건강검진을 받았습니다. 결과는 콜레스트롤, 지방간, 혈당, 간장수치 등이 정상을 조금씩 벗어나 있으나 걱정할 정도는 아니므로 체중을 줄이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에 의사는 "그게 문제가 아니고, 위에 점막하 종양 의심이 있어서 그게 걱정"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위내시경 결과를 보여 주는데, 위 점막이 단추처럼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 밑에 종양이 있는지, 다른 장기에 밀려서 그런지 의심이 가므로 1년후에 다시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마음에 걸린다"고 했더니, 의사는 "다른 사람 사진을 보여 줬다"고 말을 바꾸더군요. 상식적으로 다른 사람 사진을 보여 줄 필요는 없는 것이고, 이렇게 말하는 의사 표정도 묘하여 더욱 의심이 커졌습니다.

분명, 시기를 놓친 악성이니까 본인에게는 말을 못 해 주는 것이구나. 저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안 그래도 4-5개월 전부터 어지럼증이 있어서 개인병원 네 군데나 가도 이상이 없다고 하였고, 울산대학교 병원에 가서 MRI 뇌사진까지 찍었는데도 이상이 없다고 하더니 그게 이 병이구나. 벌써 4-5개월이 되었으니 얼마나 심각하길래......

병원에서 나와 곧바로 집에 전화를 하여 혹시 병원에서 연락온 게 있느냐고 묻고, 연락이 오면 알려 달라고 하고는 그 길로 삼성의료원으로 달려 갔습니다. 예매해 둔 울산행 열차표는 쓰레기통에 넣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삼성의료원은 '3차 의료기관이므로 타병원 의사 소견서가 있어야 한다'면서 나를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열차표를 다시 구하여 근무지 울산으로 내려와 처와 남동생, 제수 등에게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아직 편치 않았습니다.
그 뒤, 집에서 기도를 하는데 입에서 자꾸 방언찬송이 나왔습니다. 찬송이 거듭될수록 '겸손'이라는 단어가 가슴에 새겨졌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이제는 성경을 읽어도 '겸손', 극동방송을 들어도 '겸손', 찬송을 해도 '겸손', 설교를 들어도 '겸손'이라는 단어가 계속 귀에 들어 왔습니다. 성경에 겸손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많았던가요? 그전에는 별로 들리지 않았던 단어였는데....

3일 후 Good Friday가 다가와 아침부터 금식을 하는데, 사무실에 앉아 있는 저의 배에 번개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통증이 찾아 왔습니다. 횟칼로 허리를 자르듯이 통증이 쫙 지나 갔습니다. 처음에는 자세가 좋지 않아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30분 간격으로 하루 종일 이런 진통이 게속되었습니다. 저녁부터는 5분 간격으로 번개가 쳤고, 심할 때는 몸이 흔들리거나 떨렸습니다. 허리 통증이 얼마나 심한지 마치 허리를 삐걱한 사람처럼 아팠습니다.

견디다 못해 서울 삼성의료원 응급실로 갈 작정을 하고, 열차표를 예약했습니다. 어쩌면 고향 이서교회에서 보내는 마지막 주일이 될 지 모르므로, 저는 토요일 구역예배와 주일 예배를 드리고 가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주일 저녁 열차표를 예약했습니다.

토요일 저녁, 우리 집에서 구역예배를 인도한 후 음식을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권사님 한 분이 "어떤 사람이 허리를 삐걱해서 병원에 갔더니, 그게 삐걱한 게 아니라 척추에 종양이 번져 그랬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5일후에 죽었다"라고도 말했습니다. 권사님은 그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말하였습니다.

저는 속으로 '아하, 나도 5일 인생이구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저의 통증에 대해 말한 곳이라고는 서울에 있는 가족 뿐인데, 왜 권사님이 그 이야기를 반복해서 말했을까요.
처음에는 권사님이 정말 야속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선지자가 상대방의 속마음을 궤뚫어 보고 말하듯이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권사님의 말을 하나님의 경고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주일 오후예배를 마친 후, 목사님을 모시고 조용한 방으로 가서 사정을 말씀 드리고 기도를 받았습니다. 혹시라도 서울가서 못 내려오면 그렇게라도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자세히 말씀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은 "장로 안수를 앞두고 다듬어 쓰시려고 그런다"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어쨌든 목사님의 기도를 받은 후에는 마음이 편해졌고, 통증 빈도도 다소 줄어 들었습니다.

이제 청도 집에서 서울로 출발할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저는 골방으로 들어가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끓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게 맡겨 주신 일이 있으신데, 제발 이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살려 주십시오"

기도중, 선명한 그림이 눈앞에 나타나 오랫동안 머물렀습니다. 그 그림의 위쪽에는 건물이 하나 놓여 있었고, 하나님이 그걸 받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 수많은 교회들과 교인들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날 저는 진심으로 회개했습니다. 안 그래도 늘 조심해 왔는데, 하나님은 저를 슬퍼하신 것입니다. 사업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한다고 하더니 제가 그 꼴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위에 계시고, 그 밑에 박물관이 있어야 하나님과 교인들 사이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통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인데......
그 전부터 늘 묵상해 오던 “주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라는 단어를 다시 떠올렸습니다.

마당에서, 창밖으로 내다 보시는 아버지께 마음 속으로 큰 절을 드리고 대문으로 향했습니다. 장독대 부근에 이르자 돌아가시기 전의 어머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 병든 몸으로 손을 떨면서 간장을 떠 담으시던 어머님 모습입니다. 이제 나도 그 길을 따라 가려나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고, 홀로 시골에 앉아 계시는 아버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슬펐습니다.

다음날 4월 17일 월요일, 처와 함께 무조건 서울 삼성의료원 응급실로 들어 갔습니다. 그곳에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고, 어떤 장정은 고통을 참지 못해 고함을 질러댔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제가 있었습니다.
내과 의사가 배를 눌러 보고, 증상을 묻더니 “고통스럽더라도 예약해 두신 대로 목요일 다시 오라”고 말하였습니다. 지난 번 예약을 해 둔 날짜가 3일 후로 다가와 있는데 응급실에서 받아 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울산으로 도로 내려 왔습니다. 그리고 목요일 다시 서울로 올라가 소화기내과로 갔습니다. 그 다음날에는 C/T를 촬영하였고, 결과는 5월 12일에 나오므로 그때 다시 오라고 했습니다. 근 1달 후에......

그동안 진통은 계속 되었지만, 각오를 하고 나니 마음은 다소 편했습니다. 목사님 말씀처럼 하나님이 다듬어 쓰시기 위해 그러신 일이라면 하나님은 저에게 관심이 있으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뿐 아니라 제가 해야 할 기독교박물관 일과 저의 장로 안수에 관심이 있으시다는 증거로도 생각되었습니다. 서서히 힘이 생겨 났습니다.

이제 세계기독교박물관은 저의 개인사업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일하시는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저는 '주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하나님의 박물관에서 일하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업가 김종식'을 죽이신 후 '청지기 김종식'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5월 12일, 삼성의료원에 가서 진단 결과를 확인하였습니다. 의사가 사진을 직접 보여 주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의사는 "뱃속에 아무런 나쁜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간장에 약간 하얀 것이 보이는데, 물집같은 것이므로 지방간 조심하시고 6개월 후에 다시 검사해 봅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 눈에 가시를 남겨 두신 것처럼, 제가 교만해지거나 긴장을 늦추지 않도록 간장 가시를 남겨 놓으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처와 목사님, 그리고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진단 결과를 알려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저는 천국 문앞까지 갔다가 도로 돌아 왔습니다.
아직도 제가 할 일이 있음에 감사하고, 열심히 일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서 기독교박물관을 지어 한국교회의 형제자매들에게 합분태가 무엇인지, 굵은 베옷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보여 주고 싶습니다.
< 출처 : 세계기독교박물관 www.segibak.or.kr 김종식 장로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