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나뭇잎)-6월6일-174.gif
       (이스라엘 요드팟에서 쥐엄잎을 따먹고 있는 양과 염소들)

일반적으로 아벨이 바친 양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제물이었다고 풀이한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바친 양도 같은 모습이다. 그리고 유월절에 희생된 어린 양은 문설주에 뿌릴 피까지 제공해 주었으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으로 보기도 한다.

예수님을 양으로 표현한 말씀은 신약에도 두 차례 나온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일컬어 말하기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라 했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36)’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비해 예수님은 오히려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보고 양이라고 말씀하셨다. 목자없는 양(마 9:36),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마 10:6) 등이 그 예이다.

이런 성경적 배경을 통하여 우리는 양이 매우 희생적일 뿐 아니라 착하고 유익한 동물임을 알 수 있고, 그게 또한 사실이다.

문제는 염소에 대한 우리들의 편견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염소를 ‘저주받은 자, 지옥 갈 무리, 나쁜 동물’이라는 이미지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편견은 십중팔구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비롯된 것이며, 염소에 대해 잘못 배운 탓이다.

성경은 이 부분을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1~33)”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대목은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것 같이’이다. 목자는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으로 분별하였고, 이어서 나오는 임금은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라고 말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이 부분에서 양의 좋은 점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염소의 나쁜 점을 발굴하여 소위 ‘저주받은 염소’를 만들어 낸다. 대표적인 것이 '염소는 양처럼 모이지 않으며, 오히려 모인 양들을 들이받아 흩어버린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양과 염소는 참으로 좋은 대조를 보이고 있다. 함께 자랄 뿐 아니라 모양도 비슷한데, 좌편 우편으로 갈라 놓을 꺼리들이 있는 것이다. 이것들은 설교를 준비하는데 참으로 요긴하게 이용될 수 있다. 예수님도 바로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고 양과 염소를 비유하신 것이 아니겠는가?
신구약을 통하여 양이 좋은 동물로 얼마나 많이 언급되었던가? 그리고 양과 흑백으로 대조할 동물이 얼마나 필요하였던가?

그런데, 우리는 성경에 149번이나 나오는 염소를 마귀새끼로 너무 몰아 부치고 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이유들을 살펴 보자.

우선 팔레스타인의 목자들은 양과 염소를 함께 먹인다. 염소가 무익하거나 저주받은 동물이라면 염소는 골라내 내다 버려야 하지만, 그들은 양과 염소에게 동일한 관심과 사랑을 베푼다.
이것은 마지막 때에 믿는자와 안 믿는자를 골라내는 것과 다른 이야기이다. 예수님은 가라지를 마지막 때까지 내버려 두라고 하셨지, 그것을 가꾸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목자들은 염소를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양과 동일하게 양육한다. 

둘째로, 염소는 유월절 어린 양을 고를 때 양과 동등하게 취급되었다. 양이 없거든 염소로 대신하라는 정도가 아니라 성경은 분명히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출 12:5)”라고 되어 있다. 양이 유월절 어린 양 즉 예수님의 모형이라면 염소 또한 예수님의 모형인 것이다.

셋째로, 구약시대에 염소는 양과 동등하게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사용되었다. 창세기 15장 9절에서 하나님은 이미 염소를 양과 동등하게 요구하셨고, 그 후에도 염소는 항상 양과 동등한 제물이 될 수 있었다. 히브리서 9장 19절 이하에는 오히려 모세가 양의 피보다 염소의 피를 백성에게 뿌리면서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넷째로, 대속죄일에 사용하는 희생제물은 양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로 아사셀 염소이다. 대속죄일은 사람 사이의 속죄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죄를 회개하는 날로서, 지금도 환자와 어린이를 제외한 모든 유대인들은 24시간 동안 물도 마시지 않고 금식하는 절기이다.
이에 대해 레위기 16장 10절에는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대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찌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아사셀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분명한 것은 아사셀 염소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광야로 나가 죽었다는 점이다.

다섯째로, 염소는 부정한 동물이 아니므로 백성들의 음식이 되었다. 염소는 되새김질을 할 뿐 아니라 굽이 갈라져 있으므로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신명기 14장 4절에 보면 “너희의 먹을만한 짐승은 이러하니 곧 소와 양과 염소와”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염소는 사람들에게 젖을 제공해 주는 동물이기도 하다(출 23:19).

여섯째로, 염소의 털은 성막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되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성막의 지붕은 염소 털로 짠 것이다(출 26:7). 염소 털에는 양의 털보다 기름기가 더 많으므로 비나 이슬이 오더라도 곧바로 굴러 떨어지게 하므로 비가 새지 않고 수명도 길다는 장점이 있다.

예수께서 양과 염소를 예로 든 이유는 그것들이 팔레스타인에 흔한 동물이고, 실제로 목자들이 종종 양과 염소를 구별한다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게다가 양은 희고 순하지만 염소는 검고 거칠어 상호 대조적이라는 점도 좋은 비유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요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 해석은 사실 본문 속에 이미 답이 나와 있다. 성경은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것 같이”라고 하였으므로 양과 염소의 이야기를 끌어 들인 이유가 바로 이 '분별하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분별하는 방법은 양은 오른편에 두고, 염소는 왼편에 두는 것이다.

즉 임금은 왼편에 있는 염소들을 향하여 저주하지 아니 하였다. 왼편에는 염소가 아니라 ‘의를 행하지 않은 자들’이 있어서 저주를 받은 것이다. 성경은 임금이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라고 저주했다고 기록하였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염소 자체를 ‘나쁜 동물’로 몰아 부치기 보다, 염소가 가진 성질이나 속성들을 들어 양과 비교하는 정도로 넘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방식으로 인간도 언젠가는 '영적 소속'에 따라 분별될 것임을 가르치려고 한 것이지, 양과 염소 그 자체는 여기에서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는 저녁에 주인이 소와 말, 닭과 오리를 분별하여 각각 다른 마굿간으로 들여 맨다는 비유로 바뀌어도 문제가 없는 것이다. 

필자의 이런 견해에 대해 한 목사님은 매우 거친 반응을 보이셨다. 성경에는 분명하게 오른쪽 즉 양이라고 표현한 사람들은 복 받은 자라고 하였고, 염소라고 한 왼쪽의 사람들은 저주받을 자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다음 글은 필자의 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양을 오른 편에 두고 염소를 왼 편에 둔 것은 구약시대부터 오른 쪽은 영광과 존귀와 생명과 힘의 상징으로 이해되어 왔기 때문입니다.(출15:6, 욥30:12 등 참조) 반면에 왼편은 저주와 사망과 미련함과 힘의 상실을 상징했습니다.(삿3:15, 전10:2 등 참조)
그러나 평소부터 양이 선한 동물이고 염소는 악한 동물이라는 의미는 전혀 없으며 단지 흰색 양과 검은 색 염소를 대비해 선과 악, 생명과 멸망을 상징적으로 비교한 것 뿐입니다. 양이 선해서 흰색이 되었거나 구원의 자리에 서게 된 것이 아니라 구원의 뜻이 생명이요 선이라는 의미로 흰 양을 비유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선행이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의미로 온순한 양을 예로 든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에 구원과 심판 둘로 확실히 나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목자가 양 떼와 염소 떼로 나누는 행위에 비교시킨 것 뿐입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양과 염소는 어떤 자인가? 손 베드로)“
< 출처 : 세계기독교박물관 www.segibak.or.kr 성서동물 >